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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소개

고인돌문명

의식주, 도구복원, 공동체사회, 고인돌 축조에대해 안내합니다.

움집생활

우리 인간 활동이 대부분 집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에는 되도록이면 자연조건이 좋은 명당자리를 골라 짓듯이, 선사시대 사람들도 그런 곳을 찾아 집을 지었을 것이다.

고인돌시대 사람들 역시 배산임수 지역에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움집(竪穴住居)을 짓고 살았다. 대개 열 집 안팎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그 주위로는 마을의 경계와 방어를 위한 도랑을 파거나 나무 울타리를 세우기도 하였다.

고인돌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은 낮은 언덕이나 강가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점차로 낮은 언덕의 편평한 곳에 대규모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처음에는 2~4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나, 갈수록 낮은 구릉이나 강변의 충적지대로 옮겨가면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 많게는 수백여 채의 집들이 함께 모여 사는 대규모 마을로 변모해 갔다.

마을에서 발견된 집자리는 대부분 땅을 파고 집을 만든 움집의 형태로 네모난 형태와 둥그런 형태의 집자리가 발견된다. 네모난 형태의 집자리는 한반도에서 이른 시기에 등장하여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되며 중부지방의 서울 역삼동, 하남 미사리, 천안 백석동, 보령 관산리 유적에서 보이고 있는데 보통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세대의 구성원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달리 남부지방에서는 중기로 가면서 점차로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확대가족이 분화하여 혼인한 부부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 동일세대의 가족이 한 가옥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사로 식량 확보

논농사와 밭농사

신석기시대 이후로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나 청동기시대 이후로 쌀을 중심으로 한 논농사의 비중이 크게 차지하게 된다. 벼농사의 직접적인 증거로는 탄화미와 바닥이나 몸통에 볍씨자국이 찍힌 무문토기 등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탄화미는 평양 남경유적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남한지역에서 출토되었다. 1970년대 중반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다량의 탄화미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도작농경이 확인된 후 강릉 교동, 여주 흔암리, 충주 조동리, 진주 대평리, 산청 소남리 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다.

쌀과 더불어 벼농사의 직접적인 증거인 청동기시대의 논은 최근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 논산 마전리유적 등에서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의 논은 1-3평 크기의 방형이나 부정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논산 마전리의 논은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3m 내외의 장방형이나 방형으로 소구획하고,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논에 물을 대는 관개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함께 벌채용 돌도끼의 증가, 홈자귀, 돌끌, 돌대패날 등 농경도구 제작을 위한 공구의 보편화 등은 농경이 생산 경제의 기반으로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라 하겠다.

청동기시대의 논의 형태는 크게 계단식논과 부정형의 소구획된 논으로 나뉘어지는데 이것은 농경형태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소구획 논은 방형으로, 물길등의 관개시설이 함께 확인되지만, 계단식 논은 너비가 좁고 관개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이를 근거로 천수답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계단식 논은 우리나나라에서만 확인되므로 한반도 고유의 독자적인 논의 형태이면서 건답직파법의 형태로 추정된다.
논은 구릉사면의 말단을 개간한 골짜기와 중소규모의 하천이 범람하여 형성된 곳에 위치한다. 논 유적으로 유명한 보령 관창리의 경우 구릉의 골짜기 중앙을 관통하는 자연적인 도랑을 정비하고 물길 양편에 경작지를 조성하였는데, 논이 발견된 논산 마전리, 울산 옥현 유적도 구릉 아래부터 골짜기 입구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논으로 개간되었다.
논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에 대해서는 보령 관창리 유적을 대상으로 산출한 연구성과가 있는데 보령 관창리 유적의 벼 생산량은 70명의 사람이 1년의 절반정도를 소비할 수 있는 수확량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산출치는 청동기시대에는 수렵과 채집, 어로 등의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높고 전체적인 식량사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족한 식량 보충을 위한 수렵·어로생활

수렵생활

수렵은 식량과 가죽을 얻기 위한 선사인의 중요한 생업활동으로 구석기시대 이래 계속되어 오고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속도가 느린 대형동물이 주 사냥감이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날쌘 소형동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의 직접대상물을 향해 찌르는 창보다는 돌화살촉이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창과 도끼가 근거리용 수렵도구라면 활과 화살은 원거리용 수렵도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유적에서 발견되는 돌화살촉의 등장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실재로 각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뼈에는 사슴, 노루, 멧돼지, 돼지, 산토끼 등과 텃새, 철새 등의 조류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중 사슴과 멧돼지는 그 수량이 많아 신석기시대 이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던 육류임을 알 수 있다.
멧돼지와 사슴은 비교적 몸집이 크고 간편한 방법으로 사냥할 수 있어 매우 바람직한 단백질공급원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멧돼지는 오늘날에도 태백산맥 일대에 많아 깊은 산골에서는 멧돼지가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통나무를 이용한 덫을 만들거나 커다란 함정을 파서 포획하고 있다.

어로생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근해에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고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여 조개류나 해조류, 어류가 번성하였다. 해안 및 도서지역에 널리 분포된 조개더미유적에서 보듯이 신석기시대인은 초기부터 해양자원에 눈을 돌려 물고기 잡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산기술을 개발하였다.

물고기를 더 효과적으로 잡기위한 돌화살촉을 긴 막대기에 연결하여 만든 작살과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낚시, 그리고 그물을 이용한 물고기잡기 등은 안정된 식량공급원으로서 일등공신이었다.
이들은 무엇을 잡았을까. 이들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바닷가에서 조개나 굴을 채집하고 때로는 잠수해서 해초나 소라, 전복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조개외에 강이나 바다에서 낚는 물고기나 물짐승도 다양했다. 유적에서 발견된 물고기뼈는 도미, 대구,농어,참돔,넙치,가오리,숭어류등의 해수어와 잉어, 가물치 등의 담수어등도 발견되었다.

채집생활

구석기시대에 전통 생업이었던 채집은 신석기시대에도 여전히 식량을 얻은 주된 수단이었다. 특히 가공기술의 발달로 도토리는 신석기인 이후에 우리 조상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도토리는 선사시대에 중요한 식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칼로리와 영양가가 곡류못지 않게 높지만 대부분은 탄닌에서 오는 떫은 맛을 제거하기 위한 특수처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채집시기는 가을로 한정되어 있어서 겨울동안은 저장공에 저장하여 조리한다.

또한 도토리가 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유물은 갈돌과 갈판으로 집자리에서 다수 확인된다. 이외에 야생식용식물은 채소와 주식, 간식등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 1. 종실류 : 강아지풀, 피 등의 벼과 종자, 삼씨, 띠풀 종자
  • 2. 견과류 : 도토리, 밤, 호도(가래), 개암, 돌배, 대추나무
  • 3. 근경류 : 도라지, 더덕, 만삼, 모시대, 칡, 하늘수박, 참마, 고사리, 드릅나무의 수피.
  • 4. 수피 : 소나무, 뽕나무, 산초나무, 참느릅나무
  • 5. 야생콩류 : 돌콩, 새콩, 돌동부 등의 종자 또는 어린 꼬투리